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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등인의 별/읽고 ▤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by 마루몽. 2013. 9. 21.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Alexander Romanovich Luria; Александр Романович Лурия, 1902-1977)
원제 : The Mind of a Mnemonist : A Little Book about a Vast Memory 
 
 
이 책을 읽다보면 참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째서 인간은 5감 중 특히 시각 위주로 발달하게 되었을까? 
시각뇌가 냄새나 맛을 처리하는 영역보다 훨씬 더 발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그토록 강렬한 공감각을 지닌 S도 그 모든 것을 시각화시켰던 것일까? 
인간의 뇌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 공감각을 지니게 되었더라면 과연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그리고 S보다는 덜 조형적이었다면..?) 
숫자나 단어, 목소리, 맛과 냄새, 음악, 혹은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모두 한데 뒤섞인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일까? 
종소리만 들어도 거기에서 다른 모든 감각을 한꺼번에 느꼈던 S에게 세상은 얼마나 화려하고 또 얼마나 흥미진진한 곳이었을까? 

 
 S의 기록

(.....) 저는 늘 이런 감각을 경험합니다. 전차를 타고 갈 때면 제 이빨에서 그 덜컹덜컹하는 소리가 느껴지는 겁니다. 한 번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면서 아이스크림을 산 즉시 그 근처에 앉아 먹고 오면 그 덜컹덜컹하는 소리가 안 느껴지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행상에게 가서 무슨무슨 종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스크림 파는 아주머니가 그러더군요. "과일맛 아이스크림이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아주머니의 말투는 마치 그 입에서 커다란 석탄더미라든가, 시커먼 숯덩어리가 막 튀어나오는 느낌을 주는 겁니다. 결국 그런 식의 대답을 듣고 나니 도무지 아이스크림을 먹을 엄두가 안 나더군요. (.....) 이런 일도 있죠. 제가 뭘 먹으면서 책을 읽으면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읽는 책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잘 안 가곤 합니다. 감각이 온통 음식 맛으로 쏠리기 때문이지요. (.....) 저는 음식도 그 이름, 혹은 그 단어의 소리에 따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가령 마요네즈(mayonnaise)를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가더군요. 그 단어는 바로 '즈'(z, 러시아어의 철자법을 따르면) 음절 때문에 완전히 맛을 버렸거든요. (.....)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죠. 어느 식당에 갔더니, 웨이터가 와서는 식전에 과자라도 좀 드릴까요 하고 묻는 겁니다. 그러겠다고 했더니, 이 사람은 어디서 롤빵을 가져오는 겁니다. '이게 아닌데.'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건 과자가 아닌데.' 과자(러시아어로는 '코르지키korzhiki)라는 말에서 '르'(r)와 '즈'(zh) 음은 아주 딱딱하고 바삭바삭하고 씹히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죠. (.....)(1939년 5월의 기록) 

 

 

예전에 스타트랙-보이저에서 평화롭고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어느 별에서 가장 갈구하는 것은 문학(Stories-허구적 이야기)이라는 내용을 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했었다. 오랫동안 모든 것이 충족된 곳에서 어떤 부족함도 욕구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문학이 탄생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작가의 통찰력이 엿보였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S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모든 숫자나 단 하나의 철자, 아니, 쉼표 하나에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기에 커다란 덩어리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다. 시란 서로 연관성이 별로 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이었고 가장 난해한 장르였다. 모든 것을 맛보고 듣고 이미지화 시켜야 했기에 추상적인 단어는 그 뜻을 파악할 수 없었다던 S. 


 
S의 기록 
 '없음(無)'이란 단어를 예로 들어보죠. 저는 이 단어를 읽은 순간, 이야말로 매우 심오한 어떤 것(有)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없음(無)'을 오히려 실재하는 '어떤 것(有)'이라고 지칭해야 맞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왜냐하면 저는 이 '없음(無)'을 버젓이 바라볼 수 있었고, 따라서 그것은 분명 어떤 것이어야 마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비교적 깊은 어떤 의미를 이해하려면, 저로선 그 대상의 이미지를 곧바로 떠올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집사람에게 과연 '없음(無)'이 어떤 의미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개념이 매우 자명하게 여겨지는 듯 집사람은 단순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없음(無)'은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 개념을 다르게 이해했습니다. 저는 이 '없음(無)'을 바라볼 수 있었고, 따라서 집사람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사용하는 논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 논리는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의 근거 위에서 성립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볼 수 있었고, 그건 곧 우리가 사물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거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요. 만약 '없음(無)'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눈에 보일 수 있다면, 곧 그것이 어떤 것(有)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문제가 생겨났던 거죠. (.....) 

 

 


미미하기는 하지만 공감각적 특성은 유년기의 전유물일 것만 같았다. 
세월이 지나 유년기가 저 멀리 손닿을 수 없는 꿈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단지 시간적으로 멀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약간은 공감각적 특성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춘기를 지나면서의 기억들도 아득하기는 하지만 유년기처럼 완전히 분리된 듯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 이유가 덜 분화되었던 오감의 특성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그 시절의 세상은 그토록 생기발랄하고 유기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 어떤 것도 잊지 않았던 S는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강렬한 (더 강렬해진) 공감각의 소유자였고 여전히 아이 적 꿈을 쫓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여전히 앞으로 뭔가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만 믿었다. 그의 삶은 매우 수동적이었고 끝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리고 5분 전에 들은 말과 5년 전에 들은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말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 세상이 그가 소유한 세상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리라. 

 


 

목차

저자서문
제1장 프롤로그
제2장 기억술사와의 첫 만남
제3장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력
최초의 요소
공감각(共感覺)
말과 이미지
기억력의 결점
직관(直觀) 기법
망각의 기술
제4장 기억술사의 내면세계
사람과 사물

제5장 기억술사의 정신
S의 강점
S의 약점
제6장 기억술사의 행동 조절
객관적인 자료
마법에 관하여
제7장 기억술사의 인성

저자 : 알렉산드르 R. 루리야에 관하여
S : 솔로몬 셰르솁스키에 관하여
1987년판 해제 - 제롬 S. 브루너
초판 해제 - 제롬 S. 브루너
역자후기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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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Alexander Romanovich Luria; Александр Романович Лурия, 1902-1977)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신경심리학자이다. 그는 모스크바 동부의 작은 도시 카잔에서 태어나 19세에 카잔 대학(Kazan University)을 졸업했다. 대학 시절에 카잔 정신분석협회를 설립했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서신 교환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그는 사고 과정과 반응 시간 간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로 명성을 얻어 모스크바의 심리학연구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인간의 사고 과정을 분석하는 방법을 기술한 이른바 “연관 신경 방법(combined motor method)”을 고안했는데, 이는 최초의 거짓말 탐지장치의 원리가 되었다. 이 연구의 내용은 1932년에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었고, 러시아에서는 2002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1930년대 말에 루리야는 의과대학에 다시 진학했다(이는 부분적으로나마 스탈린의 대숙청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의과대학에서 실어증을 연구하면서, 특히 언어와 사고와 대뇌 피질의 기능 간의 관계는 물론이고, 또한 실어증으로 인한 보상적 기능의 발달에 대해 주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루리야는 육군병원의 연구팀에 가담하여 전투로 인한 부상으로 생겨난 정신장애의 치료법을 연구했다. 이때의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훗날 ‘두뇌심리학(Neuropsychology)’이라는 새로운 심리학 분야를 창안하게 된다.
루리야의 대표적인 임상 사례 연구로는 무척이나 특이한 기억력을 지닌 사람 ― 실제 주인공은 러시아의 언론인인 S. V. 셰르스키(S. V. Shereshevskii)였다 ― 에 관한 내용을 다룬 이 책『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The Mind of a Mnemonist)』(1968)와, 전투에서 머리를 다친 이후에 부분 기억상실 상태가 된 사람에 관한 내용을 다룬 『조각난 기억력을 지닌 사나이(The Man with a Shattered World)』(1972)가 있다. 이 저서들에는 전통적인 연구 방법과 치료 방법을 조화시킨 루리야의 독특한 시각이 잘 드러나 있는데, 그의 이러한 방법은 20세기 후반 인지과학 연구의 모태가 되었다.
루리야는 훗날 모스크바 주립대학(Moscow State University)에 심리학과를 창설하고 그 교수진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미국에서 루리야의 업적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된 데에는 신경학적 장애 사례에 관한 대중적 저서로 유명한 올리버 색스(Oliver Sacks)가 자신의 저술에서 종종 루리야의 이름과 업적을 언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