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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등인의 별/읽고 ▤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Rue des boutiques obscures

by 마루몽. 2015. 2. 23.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트와 헤어지는 순간부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래 전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기 롤랑(Guy Roland)이라는 이름의, 이름도 과거도 국적도 확실치 않은 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내면의 여행...

 

과자상자 속 낡은 사진 한 장은 바스라진 기억의 실마리가 되어 주인공을 과거라는 부정확하고 변형되기 쉽고 모호한 안개 속으로 이끌어간다. 자신이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와 자신의 애인이었을지도 모를 한 여자. 그러나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기억... 중심부로 접근해갈 수록 나른한 전개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예상하고 있었던, 가장 아픈 장면에 맞닥뜨려야만 기억이 돌아올 것만 같았던, 바로 그 부분에서 주인공은 기억의 일부를 환하게 되찾게 된다.

 

책에서 작가는 전쟁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위험과 긴박감, 어떤 사람들에겐 보호막 역할을 해주었던 위장여권과 망명 등에 대해 마치 필터를 낀 기억처럼 한 발 물러서서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호텔 카스티유, 캉봉 가. Hotel Castille, Rue Cambon.

페드로 맥케부아, 하워드 드 뤼즈, 게이 오를로프, 드니즈..

그리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

 

 

과연 나는 누구였고 누구일까?

 

어쩌면 그 대답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페드로라는 이름조차 가짜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혈혈단신의 기억상실자가 재구성해낸 과거는 단편적이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이름들, 더구나 같은 인물의 다른 이름들, 국적들은 모두 이 책을 통틀어 섬광처럼 번뜩인 단 하나의 사건에 다가가기 위한 암호였을지도 모른다. 기억상실을 가져오게 만든, 드니즈에 대한 그날의 후회 가득한 슬픈 사건에 접근하기 위한...

 

 

과거를 더듬다가 쉼표처럼 돌아오는 C. M. 위트 흥신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린 채 ‘위트의 권유로’ 흥신소의 사립탐정 일을 시작했다는 것, 니스로 떠난 위트 역시 자신의 과거를 잃었던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위트가 흥신소를 그만둔 뒤에도 적극적으로 기 롤랑의 과거 찾기를 도와주는 것으로 나는 기 롤랑과 위트가 과거에서 만나게 될 줄 알았다.

그런 일은 결국 벌어지지 않았지만, 아직도 기 롤랑, 아니 페드로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하워드를 찾아다닌다.

 

 

Les pistes s'ouvrent, se diluent, se referment en champ de points d'interrogation devant Guy Roland, détective privé, qui tente de recueillir les bribes de la vie d'un certain McEvoy. Est-il lui-même ? Est-il un autre ?